[코펜하겐 도시재생] 천년고도, 행복 도시로 거듭나다

가족과 살기 가장 좋은 도시. 유능한 글로벌 인재를 유치하기 가장 유리한 도시. 자전거 타기 가장 좋은 도시. 2025년까지 탄소 중립 도시가 되겠다고 선언한 곳. 시내에 차보다 자전거가 많은 도시. 칭호가 끝 없이 쏟아지는 이 곳은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København)이다. 혹자는 한국인이 상상하는 유럽 도시의 전형이 코펜하겐이라고도 말한다. 동화작가 안데르센(H.C. Andersen)이 작품에 남긴 묘사가 덴마크의 풍광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성과 교회, 여왕, 키가 엇비슷한 벽돌조 마감 건물, 시내 곳곳을 널찍이 차지한 공원, 노상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즐기는 동네 주민 등 ‘유럽’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낭만적인 모습이 코펜하겐에서는 일상이다. 적어도 여름에는 말이다. 평일 낮 코펜하겐 시내 공원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시민 (촬영: 안상욱) 하지만 코펜하겐이 처음부터 낭만적인 도시였던 것은 아니다. 1000년이 넘는 역사 속에 수많은 부침을 극복한 뒤에야 지금처럼 북유럽을 대표하는 도시로 거듭났다. 코펜하겐의 역사를 되짚어 본 뒤 지금처럼 살기 좋은 도시가 된 배경을 살펴보자. 코펜하겐 대표 관광지 뉘하운 (촬영: 안상욱)

12세기 어촌 마을, 바이킹 왕족의 수도 되다

코펜하겐은 10세기까지 바이킹 어촌이었다. 출토되는 유물을 보건데, 코펜하겐에는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북해와 발트해 사이에 자리한 입지와 풍부한 청어 어획량 덕분에 임시 주거지가 형성됐다. 코펜하겐이라는 이름부터 덴마크어로 무역항(Merchant's Habor)이라는 뜻이다. 덴마크 왕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왕조다. 뿌리가 서기 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덴마크 왕조의 수도는 원래 코펜하겐이 아니었다. 지금은 록페스티벌로 유명한 로스킬레(Roskilde)가 덴마크 왕궁이 있는 바이킹 수도였다. 1167년 압살론(Absalon) 주교가 지금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는 크리스티안보르 궁전(Christianborg) 자리에 요새를 지으며 코펜하겐은 바이킹 문명의 주요 거점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3세기에야 코펜하겐에 영구 거주지가 형성됐다. 살기 좋은 곳은 약탈할 것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독일 웬드족 해적과 12세기 초 독립을 선언한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외레순 해협 건너 호시탐탐 코펜하겐을 노렸다. 한자 동맹이 1369년 압살론 주교가 세운 요새를 무너뜨렸다. 덴마크인은 그 폐허 위에 1417년 코펜하겐 성을 재건했다. 코펜하겐 성은 그 뒤로 수차례 증축되며 왕궁으로 활용됐으나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는 못했다. 크리스티안 6세는 과도한 증축으로 인해 붕괴하기 시작한 코펜하겐 성을 철거하고 새로운 성을 지으라고 명했다. 1731년 코펜하겐 성 철거가 시작됐다. 1745년 코펜하겐 성이 있던 슬로츠홀멘(Slotsholmen)에 로코코 양식으로 새로 지은 크리스티안보르가 들어섰다. 슬로츠홀멘이라는 지명은 성이 들어선 섬이라는 뜻이다. 같은 자리에 지었지만, 크리스티안보르는 코펜하겐 성만큼 오래 왕궁으로서 위엄을 뽐내지는 못했다. 1794년 2월26일 코펜하겐 3분의1을 휩쓴 대화재가 크리스티안보르도 집어삼켰다. 불 난 집을 떠난 덴마크 왕족은 네 귀족 가문이 별장으로 쓰던 건물을 사들여 거처로 삼았다. 이곳이 지금 덴마크 왕궁인 아말리엔보르(Amalienborg)다. 불 탄 크리스티안보르는 재건돼 국가 행사에 상징적으로 활용됐다. 덴마크가 평화롭게 민주화된 1849년부터는 국회와 총리실, 대법원으로 활용된다. 덴마크 국회의사당, 총리실, 대법원으로 쓰는 옛 성 크리스티안보르(촬영: 안상욱)

17세기 요새 도시 완성되다

어촌 마을이었던 코펜하겐이 덴마크 왕조의 수도로 자리잡은 역사를 따라 중세로 넘어왔다. 이제는 코펜하겐이 왜 지금 같은 모습이 됐는지 알아보자. 지금 코펜하겐의 모습을 빚은 결정적인 이유는 전쟁이다. 코펜하겐은 수 차례 침략 당했다. 지정학적 입지 때문에 상업적으로는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안 4세는 17세기 초 코펜하겐을 요새 도시로 개발하는 기본 계획을 세웠다.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도시 북쪽 땅도 성벽 안으로 끌어안고자 계획했다. 하지만 덴마크가 1630년대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터라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1640년대 유틀란드 반도와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쪽 스카니아를 빼앗기며 덴마크 왕조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자 요새화 계획은 재개됐다. 20년에 걸친 공사 끝에 후대에 이르러서야 코펜하겐을 둘러 싼 성벽과 요새 12개, 그 주위를 둘러싼 해자를 완성했다. 요새는 포대로 무장했다. 1728년 완전히 요새화된 코펜하겐 지도. 아래가 북쪽이다(출처: 위키미디어커먼즈 CC PD J.F. Arnoldt)

19세기 요새 도시, 성벽을 허물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자 요새화 도시는 힘을 잃었다.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선언하자 영국은 나폴레옹 연합에서 가장 약한 곳을 목표로 함대를 출정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했으나, 프랑스와 러시아가 함대를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던 상대, 덴마크였다. 북해와 발틱해에서 영국 상선을 안전하게 운행하려면 잠재한 위협요소를 제거하는 편이 좋다는 판단이었다. 1807년 9월 영국 해군이 압도적인 화력으로 덴마크를 공격했다. 코펜하겐을 둘러싸고 9월2일부터 4일 간 포격으로 퍼부었다. 195명이 죽고 768명이 다쳤다. 도시는 화염에 휩싸였으나 전투 전 도시에서 민간인을 대피시킨지라 불을 끌 사람이 없었다. 결국 5일 덴마크는 항복을 선언했다. 영국 해군은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함대를 몰수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화난 덴마크는 중립을 포기하고 나폴레옹 전쟁에 뛰어들었으나 함대 없는 해양 강국이 아군에게 큰 도움을 주기는 어려웠다. 나폴레옹 전쟁은 결국 패배로 끝났다. 전쟁에서 진 뒤 덴마크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국고가 빈 마당에 무너진 요새를 재건하는 일은 사치였다. 1840년 크리스티안 8세는 국방위원회에 남은 요새를 임무에서 해제하라고 명령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독일과 접경 지역인 슐레스비히-홀스테인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슐레스비히 전쟁이 발발했다. 1848년부터 3년 간 지속된 1차 슐레스비히 전쟁은 덴마크가 이겼으나, 1864년 터진 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는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제국이 승기를 잡았다. 덴마크는 곡창지대인 슐레스비히, 홀스테인, 라우엔부르크 일대를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할양했다. 지금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대도시인 함부르크(Hambrug)도 이때 독일 손에 넘어갔다. 슐레스비히 전쟁을 치르며 코펜하겐은 잠시 도시 방어 시설을 확충하기도 했으나, 결국 현대전에서 요새의 역할이 크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사정거리가 긴 대포를 실은 영국 함대에 코펜하겐 성벽은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1868년 국회는 요새를 해체하는 법을 발의했다. 성벽 관문을 철거하고 성벽을 무너뜨렸다. 지금도 코펜하겐 내 지명에서 요새 도시였던 역사가 남았다. 북문(Nørreport), 서문(Vesterport), 남문(Østerport) 등지는 무장 병력이 상주하는 석조 성문이었다. 지금은 산책로로 각광 받는 카스텔레트(Kastellet)는 원래 이름 그대로 성채(Citadel)자리였다. 외레순 해협에서 코펜하겐으로 들어서는 길목을 지키는 거점을 지키는 성 안나의 보루(Sankt Annæ Skanse)라는 요새였다. 성벽은 철거됐지만 1961년까지도 민간인은 출입할 수 없었다. 별 모양 해자와 별나게 솟아오른 성벽 기초가 코펜하겐을 지키던 요새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요새 지휘관이 살던 건물은 덴마크 국방참모총장 공관으로 쓴다. 1900년 코펜하겐 주변 성곽을 철거하는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커먼즈 CC PD Alb. Gnudtzmann & Helmer Lind)

20세기 성벽, 도시를 틀짓다

성벽은 밖으로는 침략자를 막지만 동시에 안에 사는 사람을 가두기도 한다. 19세기 코펜하겐 인구는 성벽을 세운 크리스티안 4세 치하보다 4배 늘었다. 그 결과 1855년 코펜하겐 시민은 오늘날 인도 뭄바이보다 2배 높은 인구 밀도에 시달렸다. 요약하자면 코펜하겐은 도저히 살만한 곳이라 부르기 힘든 도시였다. 요새 도시가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성문이 열리자 능력 있는 시민은 너나할 것 없이 코펜하겐 밖으로 이주했다. 군사적인 이유로 거주지를 지을 수 없던 성벽 인근 부지에 1852년부터 집이 들어섰다. 도시 방호시설이었던 인공 호수(Søerne)도 건물로 둘러싸였다. 뇌어브로(Nørrebro)와 베스터브로(Vesterbro), 프레데릭스베르(Frederiksberg) 지역으로 코펜하겐이 빠르게 팽창했다. 벽을 공식적으로 허물기 시작한 1868년부터는 요새와 성벽이 들어섰던 둑도 거주지로 이용됐다. 1900년대 초부터는 브론쇼이(Brønshøj)와 발뷔(Valby) 지역도 대규모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덴마크는 독일 나치군에 5년간 점령당했다. 나치 치하에서도 코펜하겐은 덴마크 수도로 활약했다. 크리스티안 10세는 나치에게 항복한 뒤에도 경비 병력 없이 홀로 말을 타고 매일 시내를 순찰하며 덴마크 왕조가 굳건함을 국민에게 알렸다. 전쟁이 끝나고 덴마크가 해방됐다. 다른 서방 국가와 마찬가지로 덴마크도 전후 급격한 성장기를 맞는다. 코펜하겐도 성장했다. 하지만 도심의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됐다. 오래된 건물은 제대로 보수되지 못했다. 시 정부의 곳간이 텅 빈 탓에 도시 정비 계획은 제대로 실천되지 못했다. 1970년대 매년 1만2천 명이 코펜하겐을 떠났다. 이제는 코펜하겐 시내(Copenhagen City)로 불리는 옛 코펜하겐 땅에 남은 사람은 도시 밖에 거주지를 구하지 못한 가난한 학생이나 노인, 히피 등이었다. 결국 코펜하겐은 살기 힘든 도시라는 인식이 공고해졌다. 코펜하겐이 비록 거주지로는 각광받지 못했지만 덴마크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중심지라는 위상은 변하지 않았다. 코펜하겐을 떠난 시민도 코펜하겐으로 출퇴근했다. 코펜하겐 시민의 주거지로 자리 잡은 교외 지역을 코펜하겐에 연결할 필요가 생겼다.

21세기, 도심과 교외를 잇는 다섯 손가락

1947년 코펜하겐 도시계획위원회 기술국(Egnsplankontoret )은 다섯 손가락 계획(Fingerplanen)이라는 도시 개발 계획을 발표한다. 손바닥에 해당하는 코펜하겐 시내부터 다섯 손가락처럼 통근 열차 S트레인 노선을 사방으로 뻗어내 도심과 교외를 연결하고, 대중교통 이용을 활성화하며, 도심에 집중된 주요 시설을 분산한다는 구상이었다. 손가락 사이에는 녹지를 보존해 농지와 쉼터로 활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1951년 도시 개발 계획 1단계에 착수하면서부터 현실적 문제가 나타났다. 몇몇 거점 도시는 계획보다 비대해졌다. 기존 거점 도시가 새로 생긴 도시에 흡수되기도 했다. 다섯 손가락 계획에 포함되지 못한 셸란 섬(Sjælland) 북동부 지역에서는 오히려 차량이 급증했다. 2007년 당국은 다섯 손가락 계획의 한계를 인정하고 코펜하겐 근교를 ‘손바닥’에 포함한 새로운 도시 계획을 발표했다. 2007 다섯 손가락 계획(Fingerplan 2007)이다. 기차역을 지역 거점으로 강조하고자 사무용 고층 빌딩과 문화 시설은 역에서 600m 안에 지으라는 지침을 내놓았다. 또 손가락이 지나는 교외 지역 사이는 이동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거점 도시를 직접 연결하는 방사형 도로망을 확충했다. 다섯 손가락 계획은 코펜하겐을 비롯한 덴마크 수도권(Greater Copenhagen)의 지금 모습을 만들었다. 각 손가락을 간략히 살펴보자면 이렇다. 북쪽으로 뻗은 새끼손가락은 외레순 해협을 낀 전통적 부촌을 연결한다. 교외 해변에는 저택과 여름 별장, 요트가 즐비하다. 겐토프테(Gentofte), 헬레루프(Hellerup), 링뷔(Lyngby) 등을 지난다. 이 지역에는 27만 명이 산다. 북북서 방향으로 뻗은 약지손가락은 파룸(Farum), 글라드삭세(Gladsaxe), 쇠보르(Søborg) 등 상류층 주거지와 중산층을 위한 대규모 거주지를 통과한다. 이 곳에 사는 인구는 대략 10만 명이다. 북서쪽으로 뻗은 중지손가락은 코펜하겐 수도권에서 가장 산업화된 지역으로 꼽힌다. 전통적으로 제조업 시설이 많던 곳이기 때문이다. 헬레우(Helev), 발레루프(Ballerup) 등지에는 중산층이 선호하는 낮은 단독 주택 단지와 저층 아파트가 많다. 11만 명 가량이 이 곳에 산다. 서쪽으로 뻗은 검지손가락은 가장 불우한 지역을 지난다. 인구당 수입은 가장 낮고 범죄율은 가장 높은 곳이다. 글로스트루프(Glostrup)는 부촌이지만, 알베르트슬룬(Albertslund)과 토스트루프(Tåstrup)에는 저층 건물이 많다. 이 지역에 사는 14만5천 명 가운데 20% 가량은 이민자 혹은 이민 2세대로 추산된다. 마지막으로 남서쪽으로 남부 해안을 따라 뻗은 엄지손가락은 저소득 계층을 위한 고층 건물부터 시작하지만 시내에서 떨어질 수록 중산층 용 단독 주택 단지가 많이 나타난다. 흐비도우레(Hvidovre), 뢰도우레(Rødovre), 이쇼이(Ishøj), 쾨에(Køge) 등을 포함한 이 지역에는 21만5천 명이 산다. 코펜하겐이 성장함에 따라 애초 다섯 손가락에 들지 못한 아마게르 섬(Amager)도 개발 당국 눈에 들었다. 아마게르는 코펜하겐에서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땅이었기에 현대적 기반 시설이 없었다. 하지만 30분 안팎이면 시내에 도착할 수 있는 입지 때문에 아마게르도 개발되기 시작했다. 1993년 외레스타드(Ørestad)가 먼저 개발됐다. 2000년 외레순 해협을 건너 스웨덴 말뫼(Malmö)로 연결되는 외레순 다리( Øresundsbroen)가 완공되자 아마게르의 입지는 한층 더 공고해졌다. 이제 5만3천 명 가량이 사는 아마게르는 코펜하겐의 대표적인 신도시 개발 지구가 됐다. 외레순 다리는 말뫼를 코펜하겐 교외로 편입시켰다. 집값이 저렴한 말뫼에서 인건비가 높은 코펜하겐으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늘었다. 남쪽에서 바라본 코펜하겐 시내 전경 (촬영: 안상욱)

사람

삶의 질은 형편 없었지만 덴마크 수도로서 코펜하겐은 성장했다. 수도권 거주 인구는 증가했다. 코펜하겐시 정부는 코펜하겐을 살만한 도시로 만들려 노력했다. 코펜하겐시는 전후 독일에서 유행한 보행자 전용 도로라는 비범한 발상을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도로 일부에 시범 적용했다. 1950년대부터 성탄절 등 특별한 날마다 차를 막았던 스트뢰에(Strøget)를 1962년 11월17일부터는 보행자 전용 도로로 지정했다. 처음에는 한시적 조치였으나, 1964년부터 스트뢰에는 영구 보행자 전용 도로가 됐다. 물론 반발이 없지 않았다. 주변 상인은 차량 진입을 막으면 장사가 안 될 것이라 걱정했다. 운전자는 스트뢰에 개관식에 경적을 울리고 야유를 퍼부으며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했다. 보행자 전용 도로의 아버지로 불리며 1962년부터 1978년까지 코펜하겐 도시 계획 부문 시장직을 역임한 건축가 알프레드 바사르(Alfred Wassard)는 스트뢰에 사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 하지만 반대측 우려가 무색하게 스트뢰에 사업은 큰 성공을 거뒀다. 차가 사라진 도로는 인파가 차지했다. 상점은 손님으로 붐볐다. 거리를 따라 카페가 문 열었다. 스트뢰에에 잇닿은 거리도 보행자 전용 도로로 거듭났다. 스트뢰에 한가운데 자리한 채 주차장으로 쓰였던 아마게르토르브(Amagertorv) 공원은 덴마크 조각가 비요른 뇌르고르(Bjørn Nørgaard)가 만든 화강암 패턴으로 재포장됐다. 처음에 1만5800제곱미터 규모로 시작한 스트뢰에 사업은 10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면적을 포괄하게 됐다. 보행자 전용 도로 스트뢰에의 중심부 아마게르토르브 공원 (촬영: 안상욱) 스트뢰에 사업이 성공을 거두자 코펜하겐 시는 적극적으로 시내에서 차량 통행량을 줄이고 보행자와 자전거 친화적인 도시를 만드는데 착수했다. 덴마크 건축가 얀 겔(Jan Gehl)은 스트뢰에 사업으로 인한 변화 등을 연구해 1971년 <Life Between Buildings>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얀 겔은 인간적 맥락은 무시하고 기능성만 강조한 모더니즘 도시 계획을 비판하고 인간을 중심에 둔 도시 계획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얀 겔의 선언은 코펜하겐 도시 계획의 방향을 잡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하향식으로 정책 당국과 도시 기획자 혹은 건축가가 일방적으로 도시 계획을 결정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실제로 그 공간에 사는 주민의 의견을 묻고 그들에게 필요한 요소를 반영해야 공간이 제대로 활용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풀뿌리 민주주의 전통이 강한 덴마크는 상향식 도시 계획을 도입해 볼 좋은 토양이었다. 코펜하겐 시는 도시 계획을 마련하며 설계자 혹은 정책입안자를 벗어나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접촉해 뜻을 모아 그것을 반영했다. 그 결과 코펜하겐 곳곳에는 전에 없던 개성 넘치는, 하지만 동시에 시민에게 애용되는 공간이 생겼다.

자전거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든 또 다른 방법은 자전거였다. 차를 운행하려면 도로만 필요한 게 아니다. 차는 주차 공간도 차지한다. 코펜하겐 시는 한정된 공간을 시민에게 돌려주려면 도시에서 자가용을 몰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작정 차를 없앨 수는 없었다. 도시 생활에는 이동성(mobility)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코펜하겐 시는 자가용 차량 대신 자전거와 대중교통을 활용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펼쳤다. 1992년 공사를 시작한 코펜하겐 지하철은 2002년 완공돼 운행을 시작했다. 2002년코펜하겐 자전거 정책을 시작으로 매년 자전거로 출근 또는 통학하는 인구를 증가시키는데 힘 쏟았다. 시내 도로 중 양쪽 끝 2차선을 자전거 전용 도로로 바꿨다. 교통 신호 체계도 차가 아니라 자전거 주행속도에 맞췄다. 자전거 보행자 전용 다리를 비롯해 각종 편의시설도 확충했다. 그 결과 1970년 11만 명 정도였던 일일 자전거 통근∙통학 인구는 2015년 15만 명으로 늘었다. 코펜하겐 시는 2025년까지 60만 명에 달하는 코펜하겐 인구 절반 이상이 자전거로 통근∙통학하게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여기에 2017년부터 2025년까지 최대 26억 크로네(4185억 원)에 달하는 예산을 투자할 계획이다. 자전거 타는 코펜하겐 시민(촬영: 안상욱) 자전거 진흥 정책은 덴마크의 청정 산업 육성 정책하고도 궤를 같이 한다. 덴마크 정부는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중립 국가가 되겠다고 선언했는데, 코펜하겐 시는 2025년 먼저 탄소 중립 도시가 되겠다는 야심을 밝혔다. 인간 중심의 도시 계획과 자전거와 대중교통을 중심에 둔 교통 정책 덕분에 코펜하겐은 반세기가 채 지나기 전에 떠나야 할 곳에서 살고 싶은 도시로 탈바꿈했다. 지금은 유럽연합(EU)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유망한 젊은이들이 행복한 삶을 좇아 코펜하겐으로 향한다. 매달 1천 명이 코펜하겐으로 이주한다. 글머리에 언급한 수 많은 칭호를 되짚어 보면 떠오를 테다. 그것 중 어느 하나도 그냥 생긴 게 아님이 말이다. 코펜하겐 대표 관광 명소 뉘하운 (촬영: 안상욱) 다음 연재분부터는 코펜하겐 곳곳에 자리한 독특한 도시 재생 사례를 살펴보겠다. 앞으로 만날 사례는 다음과 같다. 이민자가 집단으로 모여 살아 빈민촌으로 전락한 동네에 다양성이 지닌 아름다움을 일깨운 공원. 한정된 땅 때문에 치솟는 임대료를 피하고자 물 위에 지은 학생 기숙사. 최첨단 기술과 오락시설을 겸비해 혐오 시설에서 관광 명소로 탈바꿈한 발전소. 이 사례를 통해 거시적 필요를 충족하면서도 지역적 맥락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코펜하겐의 도시 재생을 심도 있게 알아보자.

[연재] 덴마크 코펜하겐 도시 재생

  1. [인트로] 천년고도, 행복 도시로 거듭나다
  2. 바다 위에 콘테이너로 지은 학생 기숙사, 어반 리거
  3. 쓰레기 태우는 발전소를 관광 명소로, 아마게르 바케
  4. “이민자를 이웃으로” 주민이 직접 꾸린 다문화 공원, 수페르킬렌
  5. 사람이 먼저인 도시를 그리다, 겔
  6. [인터뷰] “살기 좋은 도시 만들려면 지속가능한 삶을 가장 쉬운 생활 양식으로 만들라” - 겔 파트너 디렉터 크리스티안 빌라센
  7. [아웃트로] 위기의 도시, 친환경 미래 도시로 거듭나다
이 콘텐츠는 도시 콘텐츠 스타트업 어반플레이가 후원하고 덴마크 전문 미디어 NAKED DENMARK가 제작해 양쪽 매체에 공동 게재합니다. 덴마크 도시 재생 연재는 어반플레이 미디어 아는동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