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미천했다. 학생들에게 창업가 정신을 키워주고 싶었다. 2013년 3월 도서관 1층과 건물 지하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직원은 2명뿐이었다. 몇 달 동안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직원들이 각종 행사에 뛰어들어 홍보하고 나서야 알음알음 찾는 이가 생겼다. 1년이 지나자 30명 정도가 이곳을 찾았다. 갈 길이 멀어 보였다.
2년 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무도 모르던 이곳을 8천 명에 이르는 사람이 찾았다. 2015년에는 5만 명이 넘는 사람이 다녀갔다. 크라우드펀딩에서 북유럽을 통틀어 가장 많은 투자액을 유치한 스타트업 에어테임(Airtame)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덴마크공과대학교(DTU) 창업가 정신 육성 기관이자 프로토타입 공방인 스카이랩(SkyLab) 이야기다.
▲DTU 스카이랩 전경 (사진: 안상욱)
지금은 1,550㎡에 이르는 3층 건물을 독차지하고 덴마크 창업 생태계의 일익을 담당하는 스카이랩. 2년 사이에 어떻게 이토록 성장했을까. 미켈 쇠렌센(Mikkel Sørensen) 스카이랩 CEO를 만나 성공 비결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뜻밖에 간단했다. 마치 스타트업처럼 시장이 원하는 대로 재빨리 움직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용자와 가깝게 소통합니다. 그냥 마구잡이로 만들지 않아요. 항상 사용자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묻습니다. 새로운 장비를 사거나 시설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카이랩을 이용하는 사람은 바로 그들이잖아요."
▲미켈 쇠렌센(Mikkel Sørensen) 스카이랩 CEO (사진: 안상욱)
프로토타입에서 덴마크 창업 생태계의 허브로
애초 스카이랩은 큰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DTU 캠퍼스 안에 창업가 정신의 허브이자 커뮤니티가 될 공간을 꾸리고 싶다는 뜻은 있었지만, 정식으로 프로젝트를 발주할 만한 예산은 없었기 때문이다. DTU 자체 예산으로 직원을 뽑고 도서관 한편에 공간을 마련하고서야 프로토타입 공방 스카이랩이 첫발을 뗐다.
초기 1년 반 동안은 도서관에 더부살이했다. 미켈 쇠렌센 CEO는 이 시기를 프로토타입이라고 불렀다. 스타트업은 초기 아이디어를 시제품으로 만들며 구체화한다. 스카이랩도 마찬가지였다. 프로토타입 기간 1년 반 동안 스카이랩은 DTU 학생에게 어떤 시설과 장비,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한지 물어봤다. 학생의 요구를 바탕으로 스카이랩의 정체성을 가다듬었다.
▲프로토타입 시절 스카이랩이 철거되던 당시 모습 (사진: 스카이랩 제공)
스카이랩은 창업가 정신을 배양하는 산실이자 커뮤니티다. 스카이랩의 궁극적인 목표는 혁신의 산실이자 창업가 커뮤니티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스카이랩은 DTU 안팎을 넘나들며 다양한 기관과 폭넓게 관계를 맺는다. 기업과 학생 사이에 다리를 놓고 외부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게 하고, 투자자(VC)와 학생 스타트업을 소개하기도 한다. 정기적으로 각종 네트워크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이다. 덴마크 최대 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다양한 회사가 스카이랩을 통해 DTU 학생과 연을 맺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이들을 직원으로 뽑아간다. 네트워킹은 국경도 넘는다. 스카이랩은 2가지 국제 스타트업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50명이 넘는 학생을 해외로 보냈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간 학생도 5명이다.
스카이랩은 학생들에게 창업가 정신뿐 아니라 전문성을 키워주려고 노력한다.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아주 기초적인 단계부터 팀 구성, 법인 설립, 제품 개발, 양산, 마케팅, 투자 유치 등 모든 단계에 걸쳐 맞춤형 코칭을 제공한다. 단발성 교육프로그램뿐 아니라 몇 주에 걸친 교육 과정도 있다. 필요한 경우에는 현업에서 활약하는 외부 인사를 초청해 교육을 제공한다. 이미 업계에서 자잡은 DTU 동문을 멘토로 초빙해 학생과 연을 맺어주는 동문 네트워킹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2015년에만 60여 가지 이벤트가 스카이랩에서 열렸다.
이런 소프트웨어가 돌아가려면 하드웨어도 든든하게 갖춰져야 할 테다. DTU 캠퍼스 남동쪽에 자리잡은 스카이랩은 DTU 학생이 스타트업을 꾸리도록 독려하는 환경으로 가득하다. 사무 공간은 물론이고, 실제로 시제품을 만들 수 있는 각종 기자재가 가득한 공방도 여럿이다. 로비에는 3D 프린터 및 3D 스캐너, 레이저 절삭기를 갖춘 급속 프로토타입 공방을 비롯해 목재 공방, 금속 공방, 용접실, 전기실, 화학실험실 등 웬만한 제품은 거뜬히 만들어낼 장비를 갖춰뒀다. 스카이랩 장비가 부족하다면 관련 전공 부서에서 더 전문적인 장비를 빌려 쓸 수 있다.
▲스카이랩 로비 협업공간에 삼삼오오 모여 학생들이 이야기를 나눈다 (사진: 안상욱)
도란도란 모여 얘기할 공간과 100명은 거뜬히 앉는 강당도 1층에 있다. 2층에는 사무실 3곳과 회의실 3곳, 디자인실을 마련했다. 학생들이 만든 비영리 창업 네트워크 단체인 스타더스트(Stardust)도 여기 둥지를 틀었다. 스카이랩 직원도 2층에서 일한다. 2층을 오가며 언제든 마주칠 수 있도록 계단 바로 맞은편에 개방된 공간이 직원 사무실이다. 지하 1층에는 공방을 비롯해 휴게실과 목욕 시설도 준비했다.
▲각종 기자재와 재료를 갖춘 스카이랩 금속 공방 (사진: 안상욱)
실수에 관대해야 혁신 싹튼다
스카이랩 공간의 테마는 개방성이다. 사무실도 회의실도 모두 들여다볼 수 있도록 사방이 유리 벽이다. 프로토타입 시절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프로토타입에선 방마다 문을 만들어 상자처럼 쪼갰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방에 틀어박혀 각자 자기 일만 하더라고요. 우리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었는데 말이죠. 분명 각자 방에서 필요한 일을 하겠지만, 문을 닫아버리면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게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공간을 투명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배울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내가 3D 프린터에 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저 옆에 3D 프린터로 작업 중인 여학생한테 물어볼 수 있잖아요. 이게 사방을 유리로 만든 이유입니다."
▲스카이랩 공방 한편에 둘러앉아 회의하는 학생들 (사진: 안상욱)
개방성은 스카이랩의 뼈대다. 스카이랩이라는 조직부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시작했다. 사용자의 요구에 귀를 열고, 유연하게 대응하며 지금 같이 성장했다.
“저는 스카이랩의 근본적인 철학이 개방적인 자세라고 생각해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자는 거죠. ‘이거 하라, 저거 하라’ 하지 않아요. 물론 우리도 규칙은 있어요. 규칙이 전혀 없다면 우리가 예산을 제대로 쓰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아주 개방적이에요. 새로운 아이디어가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는지 지켜보자는 거죠. 이게 스카이랩의 강점입니다."
미켈 쇠렌센 CEO는 프로토타입 기간 저지른 실수 가운데 가장 돌이키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없다”라고 잘라 답했다.
“저는 우리가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사실이 기뻐요. 그때 그렇게 실패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런 실패를 겪을 거 아닙니까. 그럼 비용이 훨씬 많이 들겠지요. 물론 우리는 지금도 실수를 자주 저지르지만요. 사용자는 우리가 의도한 것과 전혀 다른 식으로 우리 공간을 이용해요. 회의실로 꾸민 공간을 스크럽 개발실로 쓰는 식이죠. 그래서 우리는 스카이랩을 만들 때 공간을 굉장히 동적으로 꾸몄어요. 사용 방식에 따라 공간을 바꿀 수 있도록 했죠. 사용자를 예측하려 덤빌 때마다 틀렸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유연해지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유연해지려고 해요.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하듯 말이죠."
▲로비 한쪽 벽에 자리잡은 기회의 벽(Wall of Opportunities)은 스카이랩의 개방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누구나 광고를 붙일 수 있다. 외부 업체가 구인 광고를 붙이기도 하고, 학생이 같이 스타트업을 꾸릴 팀원을 모으기도 한다. 스카이랩은 관여하지 않는다. (사진: 안상욱)
이야기를 듣다 보니 궁금해졌다. 사용자가 원하는 일을 재빨리 실행하고 수없이 실패한다는데, 이 때문에 예산이 낭비돼 문제가 된 적은 없을까. 미켈 쇠렌센 CEO는 “쉽고 싸게” 실험하기 때문에 큰 비용을 낭비한 적은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데는 돈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아요. 크게 벌이지 않고 작은 프로젝트로 시작하면 되죠. 학생들이 와서 아두니오나 새 3D 프린터가 필요하다고 하면 일단 도입해보는 겁니다. 물론 값비싼 프로그램이나 세계 최정상 전문가를 초빙하는 일은 비용이 크죠. 하지만 아두이노나 3D 프린터 프로토타입 워크숍을 열어보자는 제안은 충분히 실현할 수 있어요. ‘그럼 박사 과정 학생 중에 스카이랩 시설에서 워크숍을 개설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자’고 하는 거죠. 우리는 소정의 인건비만 제공하면 돼요."
그는 가볍게 시작하면 크게 실패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제안을 받으면 늘 이렇게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이걸 빠르고 저렴하게 테스트해 볼 수 있지?’ 만일 제안이 좋은 아이디어라면 발전시키면 되고, 그다지 좋지 않은 아이디어라면 그만두면 그만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늘 쉽고 싸게 테스트하려고 노력합니다(we try to test all the time, easy and cheap)."
스타트업 육성 기관인 스카이랩이 마치 린스타트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린스타트업(lean startup)이란 아이디어를 빨리 시제품으로 구체화해 시장에 내놓은 뒤, 시장의 반응을 보고 제품을 개선해가는 창업 방법론이다. 이런 인상을 전하자 미켈 쇠렌센 CEO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맞습니다. 정말 그래요. 우리는 스타트업한테 장대한 사업 계획을 써내려가는 대신 밖에 나가서 사용자랑 얘기하라고 해요. 우리도 똑같이 해죠. 새로운 회사가 우리와 협업하고 싶다고 찾아오면 늘 환영합니다. ‘우리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빨리 부담 없는 예산으로 시도해보자’라고 합니다. 전에도 해본 경험이 있으니 자신 있거든요."
이처럼 틀에 박히지 않은 운영 방식을 윗선에서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스타트업 육성 전략을 총제적으로 운영하는 덴마크 정부나 스카이랩에 자금을 대는 DTU측이 성과를 내놓으라고 닦달하지는 않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정부가 스타트업 생태계를 직접 구축하겠다고 나서 예산을 쏟아부어 번듯한 시설을 차려놓고 성과를 요구하는 한국 상황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미켈 쇠렌센 CEO는 스카이랩이 기본적으로 ‘상향식(bottom-up)’으로 운영된다고 말했다. 한국같이 윗선이 꼬치꼬치 개입하는 일은 없다는 게 그의 대답이다.
“우리 운영비 대부분은 대학에서 나와요. 덴마크 내 대학은 모두 국립대학이죠. 그렇다고 정부가 사사건건 개입하지는 않아요. 큰 방향성은 정부가 잡아도 구체적인 운영방향은 대학이 직접 결정하죠. 어떻게 보면 우리가 정말 조그맣게 생각한 건 행운이었어요. 예산이 워낙 작아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거든요. 설령 우리가 망했더라고 큰 재앙은 아니었을 겁니다. 프로토타입 시절에는 돈을 별로 안 썼으니까요. 학생에게 혁신, 창업가 정신을 지원하는 과제는 있었지만 이런 목표를 어떻게 실현할 지도 스스로 결정해야 했어요. '몇%’란 식으로 이런저런 수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죠. 지금은 우리가 좋은 성과를 거두지만 그건 처음부터 성과를 노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좋아, 뭐가 먹힐지 알아보자’란 식으로 덤빈 덕분이죠."
지식을 가치로, 학생 창업 도울 것
사용자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늘 적극적으로 대처한 덕분에 스카이랩은 덴마크 창업 생태계에서 성공 사례로 손꼽히는 사례로 거듭났다. 직원은 단 2명에서 11명으로 늘었고, 30명에 그쳤던 사용자는 5만 명으로 뛰었다. 혼자 쓸 새 건물도 얻었다. 하지만 스카이랩은 성공에 도취되지 않았다. 미켈 쇠렌센 CEO는 스카이랩의 역할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말했다.
“학위에서 배운 지식을 현실 세계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거죠. 시제품을 만들든 외부 업체와 협업하든 스타트업을 세우든 마찬가지입니다. […] 크게 보면 창업을 하든 큰 회사랑 협업하든 모든 과정은 다 공부입니다. 스타트업을 세우거나 다른 큰 회사랑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더 능숙해지고 숙련될 겁니다. 그러니까 스카이랩에서 학생들은 지식을 가치로 만드는 법을 배우는 거죠. […] 우리는 아이디어를 가진 학생이 그것을 실현하도록 돕습니다. 그게 우리 일입니다."
▲"DTU 스카이랩 - 뭔가 시작하는 곳" (사진: 안상욱)
편집자 주: 북유럽 스타트업 생태계를 둘러보는 이 기획 콘텐트는 '안데르센의 유럽 표류기'라는 제목으로 은행권청년창업재단 D.CAMP 블로그에도 함께 게재합니다. D.CAMP에 올라간 글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