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학교 꿈꾸던 사회적 교육가, 덴마크 국제 폴케호이스콜레 IPC에서 세상을 만나다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의 기준은 가장 아래에 있습니다. 수월성 교육이 아니라 평등 교육이죠. […] 교사가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 앞에서 연극을 해요. 매트리스를 깔아놓고 ‘매트리스는 이렇게 까는 거예요', '베개 포는 이렇게 덮는 거예요' 이러면서 연기를 하며 창의적으로 알려줘요. 이런 건 기본 상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매트리스를 안 써 본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짚고 넘어가는 거죠. 안 그러면 침대보만 덮고 자는 사람도 생기거든요. 이런 부분에 저는 감동했습니다.” 2016년 7월부터 가을학기 5개월 동안 덴마크 국제 폴케호이스콜레 IPC(International People's College)에 학생으로 다녀 온 박성종 씨가 말했다. 5월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위워크 선릉역2호점에서 NAKED DENMARK자유학교, 보세이호이스콜레(Boseihøjskole)와 함께 주최한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 세미나 2019 무대였다. 자유학교 공동설립자 박성종 씨가 2019년 5월28일 서울 강남구 위워크 선릉역2호점에서 열린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 세미나 2019 무대에 올라 2016년 가을학기에 IPC에서 공부한 경험을 공유했다(사진: 안상욱)  

좋은 교육, 좋은 학교를 찾아 덴마크로 떠나다

박성종 씨는 좋은 교육을 갈망하는 사람이었다. 패러다임을 전환하며 대안을 찾는, 성찰과 조화를 바탕으로 다양함을 인정하는 학교를 꿈꿨다. 이런 학교를 만드는 길을 찾고자 10여 년 간 교육연구소, 국제교류센터, 대안학교 교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는 2014년 처음 알았다. 하자센터에서 주최한 이벤트에서 IPC라는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젊은 친구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지레 단념했다. 덴마크에서는 17.5세 이상 성인이 입학할 수 있으며, 주로 20대 초반이 폴케호이스콜레에 입학하기 때문이다. 2016년 4월 아내가 <오마이뉴스> 기사 한 편을 보내왔다. ‘전직 대안학교 교사, 덴마크 자유학교 학생이 되다.’ 기사를 잃어보니 시민기자 나이가 본인과 엇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바로 그날 밤 IPC에 지원서를 썼다. 15일 만에 합격 소식을 들은 그는 세달 뒤 6개월 된 딸을 두고 유학길에 올랐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不惑)는 나이, 마흔이었지만 더 좋은 교육 현장을 접하려는 목마름은 현실의 난관을 넘어섰다. https://youtu.be/DFlXy7ujZWQ  

"덴마크에서 세계를 만나자"

IPC는 덴마크 코펜하겐 북쪽으로 1시간쯤 떨어진 헬싱괴르시(Helsingør)에 있는 국제 폴케호이스콜레다. 다른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가 덴마크어와 덴마크 전통을 주로 가르치는 반면 IPC는 세계 속 덴마크라는 맥락에서 국제학(Global Studies)에 집중한다. 국제 학교이기에 한 학기에 100여 명에 이르는 정원 중 절반 이상은 덴마크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채운다. 수업도 국제 공용어인 영어로 진행한다. IPC는 인류 역사 최초의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상흔 속에서 탄생했다. 덴마크 교육학자 피터 매니케(Peter Manniche) 박사는 생각했다. '서로 전쟁을 했던 나라 사람들이 얼마간 함께 모여 살고 일하고 공부하면 어떨까. 세계 여러나라에서 온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일이 아닐까.’ 당시에도 이미 80년 전에 탄생해 번성한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의 철학 위에서 세계 평화를 꽃피우자는 피터 매니케 박사의 생각은 1921년 “덴마크에서 세계를 만나자”(Meet the World in Denmark)라는 표어를 내 건 IPC로 구현됐다. IPC의 여섯 가지 핵심 가치(박성종 제공) IPC는 6개 핵심 가치를 내세운다. 공감(empathy),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평화와 비폭력(peace and non-violence), 개방성과 존중(openness and respect), 성평등(gender equality), 민주주의(democracy). 일개 교과목을 넘어 학교 생활 전반에서 이런 가치를 체감하고 체득하고 체화하도록 이끄는 IPC의 문화는 100년 가까운 역사 속에서 명성을 떨쳤다. 국제연합(UN)은 IPC의 활동과 세계 평화에 기여한 점을 높이사고 1988년 IPC를 “평화의 전령”(messenger of peace)로 공인했다. 박성종 씨는 IPC가 추구하는 가치가 학교 생활에 녹아들어가 있음을 깨닫고 놀랐다고 말했다. 교과목은 물론이고, 워크숍, 커먼룸에서 경험 등 학교 생활 경험 전반에 여섯 가지 가치가 반영됐다는 얘기였다.  

“검열 안 해"

박성종 씨는 IPC에서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를 여럿 소개했다. 그 중에는 민주주의의 근본 가치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도 있었다. 박 씨는 두 번째 학기에 학생회 임원이 됐다. 출신지 별로 학생 100명이 학생회 임원을 선출할 권리를 갖는다. 박 씨는 아시아 대표로 학생회에 들어갔다. 베트남 여학우들의 지지 덕분이었다고 박 씨는 너스레를 떨었다. 쇠렌(Søren Launbjerg) 교장이 박 씨에게 학교 이사회에서 학생 대표로 발표를 부탁했다. 학생회 임원으로서 학생들의 의견을 전해달라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발표해달라는 말은 일체 없었다. 박 씨는 학생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의견을 모았다. 당연히 학교에 불만스럽다는 의견도 나왔다. 공식석상에서 발표하기 전에 교장에게 먼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교장은 단칼에 거절했다. “검열 안 해.”(no censorship) 무슨 의견을 어떻게 모아 알려달라는 주문도 없었는데,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라”며 철저히 박 씨에게 일임하는 교장의 태도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박성종 씨는 고백했다. 아무리 학생회 임원이라지만, 일개 학생에게 교장이 이 정도 자율권을 보장하는 모습에서 학생회의 자치권이 무엇인지 곱씹어 봤다고 그는 말했다.  

“뭘 배웠는지는 몰라도, 잊어버리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해"

한국에서 다른 교육을 갈망하던 박성종 씨에게 IPC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스무살 어린 청년 100명과 어울리며, 꿈만 꾸던 교육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봤다. 아니 그 속에서 함께 뛰어놀았다. 영어 연극에서 뽀빠이 역할을 맡아 열연을 펼치고, 아시아 문화 축제에서 한국 문화를 알리고, 한국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었다. 학우들과 유럽 각지를 여행하기도 했다. https://youtu.be/RQFqghqppeE 물론 놀기만 하지는 않았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를 영어로 다른 학생에게 설명하거나, 사회적 기업가로 활약하는 노숙자도 만났다. 국제연합(UN) 출신 교사가 진행하는 국제개발학 수업을 들으며 남북 청년이 통일 후를 준비하는 교육 프로젝트를 구상하기도 했다. 남북 청년 교육 프로젝트는 지금 박성종 씨가 일하는 아산나눔재단에서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는데 도움이 됐다. IPC에서 경험이 그 밖에 삶에도 계속 연결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박 씨는 강조했다. IPC를 졸업하고 2년 뒤인 2018년 여름, 해외 탐방 사업차 다시 찾은 IPC에서 박성종 씨는 IPC를 50년 전 졸업한 동창들을 만났다. 졸업 50주년을 기념해 후배와 얘기하러 모교를 방문한 터였다. 그들은 대개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IPC에서 경험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이 학교가 나에게 정말 큰 영향을 준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 체화된 경험을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폴케호이스콜레 졸업생이 입모아 말하는 귀여운 변명이었다. 박성종 씨가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연합회를 방문해 무엇을 성과로 보느냐고 물었을 때도 닮은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서 뭘 배웠는지는 모르겠는데,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신해."(I don’t know, what I’ve learned, but I’m sure I’ll never forget it.)  

"IPC의 안전함을 한국에서 구현하고파"

IPC에서 꿈 같던 시간을 뒤로 한 채 귀국한 지 3년. 박성종 씨는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의 철학을 한국에 구현하는 자유학교 팀에 합류해 IPC에서 느낀 ‘안전함’을 한국에서도 구현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저는 IPC에서 굉장히 안전함을 느꼈어요. 안전하니까 말도 하고, 뭔가 시도하게 되더라고요. 무기력함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은 안전함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지금은 비록 건물 없이 프로그램만 있는 학교지만, 자기 이유로 걷는 자유를 만끽하며 용감히 도전할 수 있는 안전한 실험실을 구현하고 싶다는 박성종 씨의 꿈이 한국에서도 꽃피기를 기대한다.  

참고 자료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 세미나 2019

  1.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에서는 ‘나’를 배운다”
  2. 좋은 학교 꿈꾸던 사회적 교육가, 덴마크 국제 폴케호이스콜레 IPC에서 세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