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떡을 많이 팔려고 했다면 금방 가게 문을 닫았을 겁니다. 돈 버는데 집중하면 빨리 많이 팔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수많은 호떡을 똑같이 찍어내야 하거든요. 지루해서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창업한 취지가 호떡을 파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호떡은 매개체입니다. 호떡을 팔며 만난 덴마크인에게 한국을 알리고, 그들이 행복한 비결을 배워 한국에 배달하는 것이 제가 덴마크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유지요.”
8년 전 덴마크로 떠나 창업 5년차를 맞은 김희욱 씨가 말했다. 김 씨는 4년 전 자전거에 철판을 얹은 호떡 노점
코판(KOPAN)으로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3년 전에는 덴마크 전문 미디어를 공동 창업하고, 지난해에는 덴마크 전문 여행사와 한식당까지 세웠다. 호떡 노점은 4년새 글로벌 미디어 그룹으로 거듭났다. “호떡 집 하나라도 잘 하라”는 주변의 조언에도 고집을 꺽지 않고 우직하게 밀어 붙이는 이유를 네이키드덴마크(NAKED DENMARK) 김희욱 공동대표에게 물었다.
호떡 노점 시절 KOPAN 간판을 들고 선 김희욱 대표 (사진: 여지형)
“네 생각을 말해"
김희욱 씨는 8년 전 처음 덴마크라는 나라를 알았다. 마지막으로 교환학생을 신청할 수 있는 4학년을 맞아 영미권 학교를 노렸으나 낙방했다. 차선책으로 유럽으로 여행 가기 좋은 유럽 소재 학교를 찾다 덴마크라는 생소한 나라를 알았다.
2010년 1월 덴마크로 향한 비행기에 오를 때도 큰 고민은 없었다. 한 학기 쉬다 오려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직접 만난 덴마크는 김 씨의 삶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모든 면이 한국과 달랐다. 첫 시험에서부터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공부하던 대로 교수님 말씀을 녹음해 달달 외워 시험을 치렀어요. 모든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했죠. 그런데 0점을 받았어요. 10여 년 동안 수 많은 시험을 치렀는데 0점을 받아본 건 이 때가 처음이었죠.”
그 자리에서 교수에게 따져 물었다. “왜 제가 0점입니까?” 교수는 당연한 듯 답했다. “나는 자네 생각을 물었는데, 자네는 내 생각을 고스란히 읊지 않았나.” 암기식 교육에 길들었던 김희욱 씨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첫 시험은 시작에 불과했다. 생활 속에 여러 지점에서 김 씨의 가치관을 의심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공기처럼 당연한 일이 덴마크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김 씨는 덴마크에서 한 학기를 보내며 당연한 일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며 시나브로 든 생각. ‘한국 사회가 정답이라고 제시한 길이 답이 아닐지 모른다.’ 그는 다른 길을 찾기로 마음 먹었다. 교환학생 한 학기는 덴마크를 이해하기엔 턱 없이 짧았다. 대학원에 진학했다.
교환학생 생활 중 (사진: 김희욱)
“나는 북한에서 온 핵 공학자”
2010년 가을 덴마크공과대학(Danmarks Tekniske Universitet∙DTU) 대학원에 입학한 김희욱 씨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대학원 입학처가 외국인 학우를 환영하는 행사에 각국 국기를 내걸었는데, 김 씨를 맞이한 건 한국 태극기가 아니라 북한 인공기였다. 소득 수준이나 시민 의식이 높은 나라라고 생각한 덴마크가 이토록 한국에 무지하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속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씨는 주눅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무지함 속에서 기회를 엿봤다. 그는 자기소개 시간에 너스레를 놓았다.
“안녕. 나는 북한에서 공부하러 왔어. 원래 핵 공학을 전공했어. 보다시피 나는 김 씨야. 북한 지도자랑 친척이란 말이지.”
북한 사람을 처음 본다고 생각한 학우들이 김 씨를 둘러싸곤 페이스북 친구를 맺었다. 짓궂은 농담 덕분에 36개국 출신 친구 80여 명이 생겼다. 김 씨는 페이스북 친구를 맺은 학우와 일일이 만나 오해를 풀고 호기심 대신 우정을 쌓았다.
교환학생 신입생 환영회 (사진: 김희욱)
행복 배달 프로젝트
대학원은 전공은 교통공학을 택했다. 선진국에서 교통 체계를 배워 한국에 돌아가면 유용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착각이었다. 덴마크는 한국처럼 교통을 차량 중심으로 설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전거로 차를 대체하려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교통공학은 물류와 가까웠다. 김희욱 씨는 세계 최대 해운회사 머스크(Maersk)와 석사 논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한국에 돌아와 취직할 길을 열어보려 했다.
공부하는 와중에도 김 씨는 궁금했다. 덴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꼽힌다. 덴마크인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사는데 퇴근 후 저녁과 주말 시간은 여유롭게 즐긴다. 궂은 날씨 속에도 삶에 만족도가 높다. 반면 한국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했는데도 한국인은 팍팍하게 산다. 정시 퇴근이 당연하지 않아 ‘칼퇴근’이라는 말이 생겼다. 왜 그럴까. 덴마크인이 행복한 비결이 무엇일까.
마침 한국 미디어에서 유학생인 김 씨에게 취재를 요청했다. 취재를 구실로 기관을 방문하고 여러 덴마크인을 만나며 답을 조금씩 깨우쳤다. 그렇게 얻은 정보는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하며 덴마크에서 만난 한국인에게도 전달했다. 그런 정보를 처음 접한 한국인 여행객이 놀라는 모습을 보며 김희욱 씨는 이런 일을 더 체계적으로 하자고 결심했다. 덴마크가 행복한 비결을 찾아내 한국에 배달하는 '행복 배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덴마크 기업에 호떡을 배달 나가 그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는 '행복 배달 프로젝트'를 수행 중인 김희욱 대표
호떡으로 덴마크를 만나다
호떡 노점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었다. 집에 초대해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이며 덴마크 친구를 사귄 경험에서 착안했다.
“사람은 음식을 함께 먹으며 가장 쉽게 친해지잖아요. 그래서 식구라는 말도 있고요. 한국 음식을 팔며 덴마크인을 만나 관계를 맺고 취재하고 싶었어요.”
덴마크에서 무슨 음식을 팔까 정해야 했다. 대학원에서 스타트업 문제 해결 방법론을 익힌 김 씨는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다. 대신 시장에 물었다. 한국에 다녀온 덴마크 친구 100명에게 설문지를 돌렸다. '덴마크에서 가장 먹고 싶은 한국 음식이 뭐니?' 예상처럼 불고기와 김치가 손에 꼽혔다. 하지만 김희욱 씨 눈에 띈 아이템은 세 번째로 이름을 올린 호떡이었다.
“김치나 불고기를 팔려면 식당을 열어야 하는데, 학교 다니던 제게 그런 돈이 어디있겠어요. 그런데 호떡은 노점에서도 팔잖아요. 저도 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죠.”
호떡 노점을 차리겠다고 결심한 뒤로는 곧장 내달렸다. 한국에 들어와 호떡 장인에게 비결을 알려달라고 덤볐다. 퇴짜 맞기 일쑤였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호떡이 맛있다는 곳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서울 남대문 시장부터 부산까지 모두 가서 배움을 청했다. 덴마크에 호떡집을 차린다는 김 씨 말에 경쟁자가 1명 더 생기는 게 아니라 한국 호떡이 세계로 뻗어가는 일임을 알아본 몇몇 사장이 마음을 열었다.
비결을 전수받은 김희욱 씨는 덴마크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노점을 차렸다. 창업 비용 1200만 원은 그동안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에 투자금을 보태 마련했다. 김 씨 부모와 가이드 아르바이트 자리를 내준 한인 노르웨이 여행사 사장이 자금을 지원했다.
“이건 네가 꼭 맛봐야 해"
노점용으로 개조한 세발 짐 자전거에 한국에서 공수한 철판을 얹고 지붕을 올렸다. 김희욱 씨 첫 매장이었다.
노점이라고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다. 덴마크에서는 노점을 열어도 지방자치단체에 영업신고를 하고 자리를 배정 받아야 한다. 김 씨 역시 호떡 노점을 펼칠 자리를 얻으러 신청 마감 일주일 전 코펜하겐시청을 찾았다. 호떡을 덴마크에 소개하겠다는 계획서를 만들었다. 한국 호떡이 무슨 음식인지 모를 테니 호떡 30장을 구워 갔다.
하지만 노점 담당자는 바쁘다며 김 씨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호떡을 건넬 기회조차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주변에 일하는 시청 직원에게 호떡을 나눠주려 했지만 다들 본체만체였다. 김 씨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뇌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체념하고 시청을 나서려는데 어머니뻘 되는 사무실 청소부가 김 씨를 불러세웠다. “그게 뭐라고?” 처음으로 호떡에 관심을 보인 그에게 김 씨는 신나서 설명했다.
“덴마크에는 한국 겨울 별미인 호떡을 팔고, 호떡 팔며 만난 덴마크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한국에 배달하고 싶어요."
호떡을 한 입 베어 문 그는 김 씨 손에서 호떡과 사업계획서를 낚아채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노점 담당자에게 직접 호떡을 건넸다. “이건 네가 꼭 맛봐야 해.” 김 씨는 작은 기적을 맛 봤다.
몇 주 뒤 코펜하겐 시청에서 우편물이 도착했다. 22번째로 노점 영업을 허가 받았다는 서류였다. 코펜하겐 시내에서 영업할 수 있는 노점 중 마지막 순번으로 김 씨 호떡 노점이 인정받은 것이다. 2014년 2월 덴마크 최초 호떡 노점이 코펜하겐 시내를 누비기 시작했다.
김희욱 대표가 코펜하겐시청 광장에 자전거 노점 자리를 잡고 장사 중인 모습
노점이 닻 내리다
창업 첫 해는 처참했다. 많이 벌 때도 하루 매출이 500크로네(8만9천 원)에 그쳤다. 만날 비 바람 맞아가며 장사하는 김희욱 씨가 불쌍하다고 친구들이 돌아가며 장사를 도와줬지만 이익은커녕 알바비 챙겨줄 돈도 없었다. 고마운 마음에 그날 장사를 도와준 친구와 저녁 한 끼 사먹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다.
시간도 없었다. 호떡을 팔며 다양한 덴마크인을 만나 취재해 한국에 전하려 노점을 열었는데, 당장 장사에 매달리느라 얘기를 듣기만 할 뿐 전달할 시간이 없었다. 호떡만 팔아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가이드 아르바이트도 병행해야 했다. 정처 없는 노점 장사로는 미래를 계획할 수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며 1년을 버텼다. 장사를 계속해야 할 이유가 매일 조금씩 흐려졌다.
비 오는 날 KOPAN 호떡 노점 자전거(사진: 안상욱)
생각을 정리하며 재충전할 요량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친구와 부모를 만났다. 김 씨 부모는 대학원까지 졸업한 외아들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다고 걱정했다. 주변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을 향할 때보다 더 무거운 마음을 안고 덴마크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올랐다.
경유지인 두바이에서 심상치 않은 보도를 접했다. 진도 앞바다에 여객선이 좌초됐지만 승객은 모두 구조됐다는 기사를 봤다. 안심했다. 잠시 친구를 만난 뒤 코펜하겐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린 뒤에야 진상을 파악했다. 300명이 넘는 사람이 수몰됐다는 사실을.
행복을 한국에 배달하겠다고 떠들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런 시국에 행복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장사를 접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진 그 때, 처음 호떡을 굽기 시작한 이유가 떠올랐다. 학창 시절 생계를 해결하려고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원고 기고와 현지 가이드일 덕분에 덴마크를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마음을 다잡은 뒤에도 장사를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동안 못한 일을 하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를 전달할 시간을 만들려면 먼저 사업을 안착시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호떡 노점이 자리 잡은 계기는 우연히 찾아 왔다. 2014년 여름 코펜하겐에서 처음으로 김치 페스티벌이라는 한식 축제가 열렸다. 다양한 한국 음식을 소개하고 싶었던 페스티벌 주최 측이 초대해 처음으로 길거리가 아닌 시장에서 장사를 해봤다. 호떡 집에 불이 났다. 몇 달 동안 팔아야 할 호떡을 하루 만에 다 팔았다. 재료가 모자라 장사를 중단할 정도였다.
토브할렌 시장 앞에 자리 잡고 호떡을 파는 김희욱 대표
이때 경험을 떠올린 김희욱 씨는 2015년 김치 페스티벌이 열렸던 토브할렌(Torvehallerne) 시장 앞에 고정 자리를 배정받았다. 임대료를 내고 파트타임으로 일할 직원을 뽑았다. 호떡 노점은 스태프에게 맡겨두고 일당이 하루 매상보다 높은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다녀 번 돈으로 월급을 줬다. 여행사 대표에게 투자 받은 돈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세월호로 상처받은 한국인에게 다른 길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 가이드 일에 한층 매진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전달한 만큼 좋은 반응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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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들
추운 북유럽 땅에서는 작은 온기도 사람을 불러모은다. 김희욱 씨가 댕긴 모닥불은 덴마크를 찾은 한국인은 물론이고 한국이 궁금한 덴마크인도 끌어모았다. K팝을 좋아하는 덴마크 중학생은 김 씨에게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호떡을 주문했다. 한국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 하나 들고 혈혈단신 덴마크로 온 음악을 사랑하는 청년은 호떡 노점에서 일하다 덴마크 여자친구를 만났다. 덴마크 시장을 탐방하러 온 한 대기업 회장은 간판조차 없던 김 씨의 호떡 노점을 보고는 코판(KOPAN)이라는 이름을 점지해줬다. 김희욱 씨가 호떡을 굽지 않아도 호떡 자전거를 찾는 이는 늘어났다. 그 가운데 인연도 만났다.
공동창업자 안상욱 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기자 일을 하다 행복을 찾아 2015년 10월 덴마크에 온 안 씨는 대뜸 김 씨에게 만남을 청하곤 호떡 노점에 채용해달라고 부탁했다. 스스로도 요리는 젬병이라는 안 씨를 호떡 노점에 선뜻 채용할 수는 없는 노릇. 대신 그와 얘기 나누며 방향성이 같음을 확인한 김희욱 씨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안 씨에게 알바 자리가 아닌 동업을 제안했다.
안 씨 역시 행복의 비결을 찾아 덴마크에 왔다고 말했다. 김 씨는 혼자서 풀지 못 한 숙제를 함께 풀어보자며 안 씨에게 손 내밀었다. 안 씨는 흔쾌히 응했다. 첫 만남 한 달 뒤, 국내 첫 덴마크 전문 미디어
NAKED DENMARK가 탄생했다. 김희욱 씨의 현지 인맥과 안상욱 씨의 취재력이 만난 결과물이었다. 두 사람은 NAKED DENMARK 공동대표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먹고사니즘 혹은 지속가능성
미디어 스타트업을 함께 꾸렸으나 미디어만 할 계획은 아니었다. 한국어 콘텐츠로는 수익화가 힘들다고 판단하고 시작부터 미디어 밖에 수익 사업은 만들기로 결정했다.
첫 번째 수익 사업은 덴마크 현지 여행사
인사이드덴마크(INSIDE DENMARK)다. 김희욱 대표가 혼자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하며 KOPAN 운영 비용을 충당했던 경험이 있기에 미디어와 연계한 여행사로 금방 매출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자체 설계 여행 상품 판매가 예상보다 저조했다. 한국 여행객은 덴마크 한 나라만 오기보다 북유럽 여러 국가를 돌아보기를 선호했다. 1년이 지나도록 여행사로서 매출보다 김희욱 대표가 개인적으로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뛰는 매출이 더 컸다. 수익 사업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셈이다.
1년간 시도가 실패했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더 빨리 사업을 궤도에 올릴 방안을 고민했다. 당장 매출을 만들려고 보니 김희욱 씨가 혼자 운영하던 호떡 노점 KOPAN이 눈에 띄었다. 음식 장사는 개별 단가는 낮아도 매출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현금 흐름을 창출하기 유리해보였다. 사업을 시작하는 단계이기에 매출 규모보다 지속가능성을 확인해야 했던 두 사람은 2016년 3월 KOPAN을 NAKED DENMARK 사업 영역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즈음 다른 인연이 빛을 발했다. 애초에 여행사 매니저로 NAKED DENMARK에 합류한 조혜림 씨다. 조 씨는 워킹홀리데이로 덴마크에 1년 간 체류하며 김희욱 씨를 알았다. 김 씨와 미디어를 공동창업한 안 씨는 첫 번째 에디터로 조혜림 씨를 영입했다. 조 씨가 워킹홀리데이 생활 중 매일
블로그에 글을 올린 점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조혜림 씨를 눈여겨 본 두 공동대표는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에게 NAKED DENMARK 초기 멤버로 합류하라고 제안했다. 덴마크에서 경험을 활용하고 싶던 조 씨는 잠시 고민한 뒤 NAKED DENMARK 팀에 합류했다.
처음 조혜림 씨는 여행사 상품을 기획하고 마케팅하는 역할을 맡았다. 사업 영역을 요식업 쪽으로 확장하고 무게 중심을 KOPAN으로 옮기자, 조혜림 매니저의 업무 영역도 자연스레 KOPAN으로 바뀌었다.
2016년 5월 덴마크행 비행기에 오른 조혜림 씨는 덴마크인에게 음식 문화를 통해 한국을 알리는 한식 체험 공간을 여는데 매진했다. 한국에서 준비한 레시피를 덴마크인에게 선보이고 반응을 조사해 다시 현지화하는 작업을 거듭했다. 사업 모델도 가다음었다. 우여곡절 끝에 2016년 9월 코펜하겐 복판에 한식당 KOPAN RICE가
문을 열었다. 자전거 노점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트레일러로 다시 태어났다. 두어 명이었던 파트타이머도 10명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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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미디어 그룹이라는 실험
호떡 노점에서 싹 튼 행복 배달 프로젝트는 3년 만에 덴마크 전문 미디어 그룹으로 성장했다. 호떡 노점과 한식당, 미디어, 여행사가 결합한 NAKED DENMARK는 전례 없는 실험을 벌이는 중이다.
판은 커졌지만 덴마크가 행복한 나라가 된 비결을 발굴해 한국에 전하자는 초심은 변하지 않았다. 목표를 추구하는 방법을 바꿨을 따름이다. 규모가 커진 덕분에 두 나라 사이에 다리를 놓자는 사명을 실천할 수 있게 됐다.
덴마크 소식을 한국에 전달하는 일방향성을 넘어 , 덴마크에도 한국을 알리는 일도 시작했다. 한식당이라는 공간을 십분 활용해 매력적인 한국 상품을 덴마크에 소개한다. 접근성이 좋은 노점은 한국 문화를 덴마크인에게 알리는 전초기지로 활용한다. 여기서 만난 덴마크인은 덴마크를 공부하러 온 한국인에게 소개해준다. 이런 이야기는 다시 미디어로 나눈다. 여전히 삐걱거리지만 김 씨는 NAKED DENMARK라는 실험을 덴마크에서 검증한 뒤 전 세계로 확장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음식으로 외국 사람을 만나고, 그곳에서 한국인이 기회를 찾아 도전할 밑바탕을 만들고, 그 이야기를 미디어로 전달해 두 나라가 교류하게 돕고 싶습니다. 한국과 덴마크 두 나라를 연결하는데 요식업, 여행, 미디어 세 요소가 잘 결합해 작동하는지 실험하는 중입니다. 우리 실험이 성공한다면 세계로 진출할 모델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이 세계로 뻗어나갈 디딤돌로 저희가 활용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