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에 지은 기숙사
이곳은 수상 기숙사, 어반 리거(Urban Rigger)다. 어반 리거는 합리적인 가격에 지속가능한 건축물을 만들어 저렴한 학생 주거 시설을 제공하려고 탄생했다. 콘크리트로 부유물(pontoon)을 만들어 물에 띄우고, 그 위에 제 역할을 다 한 화물 컨테이너 6개동을 별 모양으로 쌓아 거주 공간으로 활용한다. 어반 리거 바깥 모습 (사진: 안상욱) 어반 리거 한 동에는 12명이 산다. 한 층에 3개동씩 2층으로 쌓은 콘테이너 6개동에 원룸 12실을 마련했다. 개인 공간은 24~27㎡(7~8평)에 불과하지만 옥상 정원과 1층 정원을 비롯한 공용 공간을 445㎡ 규모로 확보해 좁게 느껴지지 않는다. 입주자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활하게 유도하기 위해 공용 공간을 최대한 확보했다. 무게가 550톤이라 태풍이 와도 좌초되지 않지만, 물 위에 떠 있기에 예인선으로 끌고 건물째 이사갈 수 있다. 어반 리거 옥상 전망대에서 본 코펜하겐 시내 야경 (Urban Rigger 제공)몰려드는 유학생, 심화되는 주택난
어반 리거가 코펜하겐에서 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코펜하겐이 주거지를 확보하는 속도가 인구 증가폭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살펴봤듯 각고의 노력 끝에 코펜하겐은 떠나야 할 도시에서 살고 싶은 도시로 거듭났다. 하지만 치솟은 인기는 많은 도시 문제를 야기한다. 인구 증가가 낳는 대표적인 문제는 주택난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코펜하겐으로 유입되는 인구는 매달 1천 명에 달한다. 특히 젊은 세대가 기회를 좇아 코펜하겐으로 모인다. 덴마크는 덴마크 국민에 그치지 않고 유럽연합(EU) 회원국 시민권에게도 고등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유학생은 교육의 기회뿐 아니라 국제적 분위기와 직업적 기회를 좇아 코펜하겐으로 몰려든다. 코펜하겐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은 2만2천 명이지만 이 중 코펜하겐에 거주하는 이는 1만 명뿐이다. 나머지는 수도권 혹은 스웨덴 말뫼에서 통학한다. 수요는 치솟는데 공급은 제자리 걸음이다. 여느 오래된 유럽 도시처럼 코펜하겐에도 빠른 성장을 막는 걸림돌이 많다. 일단 고층건물을 마음대로 짓지 못한다. 시내에는 6층이 넘는 건물이 거의 없다. 1905년 건설된 시청 종탑 높이를 기준으로 더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는 법을 1911년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모더니즘 양식으로 고층 주거단지를 지었으나, 개인 공간을 원하는 덴마크인에게 외면받았다. 결국 이민자와 저소득층만 모여들어 빈민가(ghetto)로 전락했다. 이 때 형성된 고층 주거단지 빈민가는 지금도 덴마크 사회에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다. 그래서 덴마크인은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할 고층 아파트를 더 싫어하게 됐다. 소비자가 싫다는 상품을 비싼 돈을 들여 만들 기업이 있을까. 공급이 늘지 않으니 결국 가격은 치솟았다. 코펜하겐에 괜찮은 원룸(studio)을 빌리려면 한 달에 150~200만 원이 든다. 평범한 유학생이 지불하기엔 턱 없이 비싸다. 저렴한 학교 기숙사가 있기는 하지만 유학생과 덴마크 다른 지역에서 공부하러 온 덴마크 학생이 나눠 써야 하기에 경쟁률이 높다. 기숙사 추첨에 떨어지면 통학 가능한 지역에 셋방을 빌리는 길만 남는다. 거실과 부엌, 욕실을 공유하고 침실만 따로 쓰는데도 한 달에 70만 원 안팎을 내야 한다. 이마저도 계속 오르는 추세다.아버지 마음에서 발현한 기업가 정신
덴마크 기업가 킴 로우드루프(Kim Loudrup)는 대학생이 된 아들이 코펜하겐에 살만한 집을 찾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코펜하겐의 주택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 유럽으로 눈을 돌리면 2025년에는 학생 주거지 400만호가 부족하다는 예상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업가 아니던가. 문제 속에는 늘 기회가 있는 법. 킴 로우드루프는 세계 대도시가 저렴한 학생 주거공간을 마련하는데 골머리 썩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기회를 찾아 냈다. 이 문제를 해결할 경우 전 세계가 시장이 될테니 도전할 만한 과제였다. 킴 로우드루프는 폐컨테이너로 집을 만들자고 발상했다. 저렴한 가격에 튼튼한 구조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건물을 땅이 아니라 물 위에 지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코펜하겐에서 집을 구하기 어려운 이유는 근본적으로 땅이 부족하기 때문이니까, 땅을 벗어나면 주택난을 새로운 차원에서 해소하는 길을 여는 셈이다. 도심을 지나는 물길은 다른 교통수단이 발달한 뒤로는 더이상 물류망으로 바쁘게 활용되지 않고, 관광이나 여가 용도로 가끔 이용될 따름이다. 대다수 주요 도시는 바다나 강을 끼고 있으니 수출 상품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충분해 보였다. 그는 친구이자 유망한 건축가인 비야케 잉겔스(Bjarke Ingels)에게 이 아이디어를 얘기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이 아이디어를 실현시키자고 손잡았다. 그 자리에서 스케치한 그림은 고스란히 지금 초기 모델로 코펜하겐 항에 떠 있는 어반 리거 1.0로 태어났다. 킴 로우드루프는 2013년 11월 덴마크개발주식회사(Udvikling Danmark A/S)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수상 기숙사 프로젝트 어반 리거를 사업화하기 시작했다. 비야케 잉겔스 역시 회사 차원에서 어반 리거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비야케 잉겔스 그룹(BIG)은 어반 리거 디자인을 맡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rCTtRk_CiqE첨단 기술과 업사이클의 만남
어반 리거는 초기부터 지속가능성을 화두로 삼았다. 유학생에게 주거 공간을 저렴하게 제공하는 경제적 지속가능성은 물론이고, 주거공간 자체를 친환경적으로 만들려 노력했다. 당장 눈에 띄는 점은 폐컨테이너다. 컨테이너는 글로벌 물류망이 실현된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규격화돼 있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구할 수 있다. 컨테이너는 화물을 보호하지 못할 상태가 되면 폐기된다. 고철 시세가 높으면 녹여서 철로 재활용하지만, 시세가 낮으면 통째로 버림받는다. 운반비가 재활용한 값어치보다 비싼 탓이다. 컨테이너를 녹이는데는 8.5메가와트(MW)에 달하는 에너지가 들어간다. 어반 리거는 폐컨테이너를 그대로 구조물로 활용해 에너지 소비량을 450킬로와트(kW)로 줄였다. 새 컨테이너를 만들었다면 배출됐을 이산화탄소(CO2) 1100톤을 절감한 것은 덤이다. 폐컨테이너를 재활용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주거용 건축물이 소비하는 에너지 가운데 70~80%는 난방과 온수 공급에 쓰인다. 어반 리거는 난방에 쓸 에너지를 바다에서 얻는다. 깊은 바닷물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에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점에 착안한 것이다. 바다 깊은 곳까지 연결된 800미터 길이 난방 파이프에는 부동액과 섞인 물이 흐른다. 5킬로와트시(kWh) 전력만 소모하는 난방 펌프가 부동액을 순환시킨다. 해수 발전은 지열 발전보다 효율도 높다. 해수 난방시 펌프로 돌아오는 물은 지열보다 5~6도 뜨겁다. 여름에 섭씨 18~21도 정도인 주변 바닷물로 어반 리거는 40~55도까지 덮인 온수를 얻는다. 겨울에는 해수도 2도 정도로 차가워지지만 어반 리거 열교환 시스템은 온수를 70도까지 끓인다. 해수 난방 시스템은 덴마크 에너지 솔루션 기업 단포스(Danfoss)가 개발해 제공했다. 지붕에 설치한 한화큐셀 태양광 발전기는 최대 7.5킬로와트시 전력을 만들어 외부 전력 없이도 난방 펌프를 거뜬히 돌린다. 남은 전력은 배터리에 저장해둔다. 이렇게 어반 리거는 난방과 온수 공급에 필요한 에너지 중 75%를 바닷물에서 얻는다. 어반 리거 해수 난방 시스템 (Urban Rigger 제공) 단열재에도 첨단 기술을 활용했다. 우주선에 쓰는 에어로겔(aerogel)과 맥주나 음료수 캔을 재활용한 알루서모(Aluthermo) 반사 단열재로 주거공간을 둘러쳐 바다 바람에 열을 빼앗기지 않는다. 어반 리거가 만든 열은 95%까지 보존된다. 글로벌 파트너사와 최첨단 기술을 접목한 덕분에 어반 리거는 컨테이너 주택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기존 건축물보다 난방 에너지 소모량을 81%까지 감축했다.버림 받은 공간에 그러모은 삶
어반 리거는 코펜하겐의 버려진 공간에 사람을 불러모아 지역을 재생한다는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어반 리거는 프로토타입 동이 정박한 레프샬레외엔(Refshaleøen) 섬에 2019년 4월까지 5개동을 더 짓고 서로 연결해 학생 72명이 모여사는 작은 수상 마을을 조성할 계획이다. 어반 리거 여러 동을 연결해 수상 마을 조성할 계획이다 (Urban Rigger 제공) 레프샬레외엔은 코펜하겐 방위 목적으로 조성된 인공 섬이다. 근대에 들어 요새가 철거된 뒤로는 조선소 부지로 활용됐다. 조선업이 호황일 때는 덴마크의 공업을 상징하는 장소로 부각됐으나, 인건비 상승 등으로 조선업이 경쟁력을 잃고 1996년 조선소가 부도난 뒤로는 거대한 조선소 시설이 드문드문 남은 채 버려졌다. 어반 리거는 2017년 여름 프로토타입 1개동을 공개하고, 코펜하겐대학교 재학생 중 입주자를 모집했는데 대기자가 수 천 명이다. 2018년 5월 초 첫 입주자가 어반 리거 프로토타입 동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어반 리거는 버림 받은 땅 레프샬레외엔 섬에 생기를 불러왔다. 조선소 부지라 기간 시설이 없어 일반 주거 시설을 짓기 어렵지만, 어반 리거는 전력과 수도만 연결하면 자생가능한 주거시설을 만들어 불모지를 사람이 살 만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어반 리거 최고운영책임자(COO) 비요른 뇌고르(Bjørn Nørgård)는 “오늘날 많은 구식 산업항이 문을 닫는 추세”라며 “어반 리거가 버림 받은 지역에 새 생명을 가져왔다”라고 말했다. “어반 리거가 주춧돌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젊은이와 노인을 불러 모아 함께 살게 하는 거죠. 주위를 둘러보세요. 아무 것도 없잖아요. 이런 공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죠.”규제는 해결할 숙제
물론 바다 위에 사람이 거주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특히 규제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항구 도시 코펜하겐도 배는 거주지로 등록할 수 없다. 수상 가옥인 어반 리거 역시 아직은 거주지로 등록하지 못한다. 기존 주거지의 틀을 벗어난 어반 리거가 거주시설로 인정받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멀다고 가지 못할 길은 아니다. EU가 도심 주거공간을 확보하는 과제를 다각도로 검토하는 덕분에 덴마크 규제당국도 어반 리거를 전향적으로 지원한다. 코펜하겐 항구에 어반 리거 6개동을 짓는 시범 사업도 코펜하겐시가 허락했다. 비요른 뇌고르 COO는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당국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프로젝트이기에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어반 리거 같은 수상 기숙사에 해당하는 가이드라인은 없습니다. 하지만 1~2년 정도 규제당국과 논의하면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도 스웨덴에서 건축 허가를 기다리는중인데요. 2년 정도 걸릴 거라고 봅니다."북유럽에서 전 세계로
이제 막 첫 발을 덴 어반 리거는 벌써부터 전세계에서 관심을 모은다. 스웨덴 건축 공모전에 당선돼 2년 안에 24개동을 수출할 예정이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도 주문이 들어왔다. 한국에서도 사업차 방문객이 온다. 어반 리거는 코펜하겐 항구에 6개동을 지으며 얻은 노하우를 접목해 2020년까지 어반 리거를 대량생산할 시설을 갖출 계획이다. 지금은 덴마크와 북유럽에 집중하지만, 대량생산 체계를 완비하면 세계 시장에 진출할 생각이다. 플라잉타이거 등 세계 시장에서 활약하는 덴마크 기업에서 일한 라스무스 룀링(Rasmus Rømling)을 2017년 5월 최고경영자(CEO)로 발탁한 것도 글로벌 진출을 위한 포석이다. 비요른 뇌고르 COO가 말했다. “지금은 학생이 모여 사는 기숙사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노년층이 모여 사는 코리빙 하우스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미 그런 문의를 받기도 했지요. 또 수상 호텔로 만들 수도 있죠. 한국에 만든다면 부티크 호텔이 될 거 같은 걸요?"[연재] 덴마크 코펜하겐 도시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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